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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화국의 착시
'한국 미술계는 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가?'
얼마 전, 한 지역 공공 전시장에서 열린 ‘청년작가 기획전’을 찾았다.
전시장 입구에는 화려한 현수막과 함께 “선정 작가 20인”이라는 문구가 크게 걸려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을 한 바퀴 도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작품 하나하나가 짧은 설명문보다도 빈약했기 때문이다.
벽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걸려 있었지만, 그 위에는 몇 번의 붓질이 전부였다.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경계의 해체를 통한 자아의 재구성”
작품은 짧았고, 문장은 길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또 다른 전시에서는, 물감을 흘려 만든 우연적 흔적 위에 "우주", “감정의 축적과 폭발”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작업은 어느 공모전에서 선정된 이력이 있었고, 그 이력은 다시 다음 전시로 이어졌다. 작품은 반복되었지만, 선정은 계속되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작품’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선정 이력’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한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에서는 더 노골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작가들은 거의 동일한 형식의 작업노트를 제출했다.
“지역성과 개인 서사의 접점”
“동시대적 맥락 속의 실험”
“매체의 확장 가능성”
문장은 서로 달랐지만, 의미는 비슷했고, 작품은 더 비슷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템플릿이 존재하는 것처럼.
심사위원은 그중 일부를 골라냈고, 선정된 작가들은 다시 다른 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탈락한 작가들은 다음 공모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림 자체에 대한 질문은 점점 사라졌다.
“왜 이 그림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이 문장이 통과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 구조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계층을 만들어냈다.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잘 쓰는 사람’,
그리고 ‘잘 아는 사람’.
어느 전시 오프닝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작업 좋더라.”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획 하나 있는데 같이 하시죠.”
그날의 작품에 대한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관객은 어디에 있는가.
그림을 보러 온 사람은 존재하는가.
현실은 냉정하다. 많은 전시가 ‘서로를 확인하는 자리’로 기능할 뿐, 대중과의 접점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계속 생산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전시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지원을 위한 이력, 다음 관계를 위한 명분.
이쯤 되면 미술계는 하나의 착각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한다.
전시가 많으면 생태계가 건강하다는 착각.
작가가 많으면 수준이 높아진다는 착각.
지원이 많으면 발전하고 있다는 착각.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일 수 있다.
기준이 없는 팽창은 필연적으로 평균을 낮춘다.
비평이 사라진 자리에는 칭찬이 남고, 칭찬이 반복되는 곳에서는 아무도 성장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명분으로, 어떤 수준의 작업이든 비판을 회피한다.
그러나 다양성은 기준의 부재가 아니라, 기준 위에서의 차이를 의미한다.
지금의 미술계는 묻지 않는다.
잘했는지, 왜 했는지, 무엇이 남는지, 나를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저 반복한다.
전시를, 지원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안전한 칭찬을.
이 구조가 지속된다면, 미술은 더 이상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방이 될 것이다.
끝없이 반사되지만, 아무것도 깊어지지 않는 공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전시의 숫자가 아니라, 작품의 밀도를 말해야 한다.
지원의 규모가 아니라, 기준의 명확성을 따져야 한다.
관계의 확장이 아니라, 비평의 복원을 고민해야 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불편해야 한다.
누군가를 긴장시키고, 질문하게 만들며, 때로는 배제와 선택을 요구한다.
그 불편함을 지워버린 순간, 남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안전한 활동’일 뿐이다.
출처 : Hyunwoo Chang 페북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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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열의 댓글.....
예술의 정형화가 없다보니 다양성이 난무하고
예술의 다양성아 난무하니 부작용이 나타나고
예술의 부작용이 나타나니 착각에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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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해체를 통한 자아의 재구성”
"우주"
“감정의 축적과 폭발”
“지역성과 개인 서사의 접점”
“동시대적 맥락 속의 실험”
“매체의 확장 가능성”
이런 문장들이 전시 서문이나 평론, 평가에서 난무한다.
미술가들은 작품 이해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곡학아세 혹세무민 曲學阿世 惑世誣民의 글들을 받아서 사용되고 있는 문장들이다. 공감이 된다.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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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는 지역뿐만 국내에서도 한 평론가 글들로 인해서 여러 미술가가 한 평론가의 글을 받게 되면 작가 모두가 우주적인 작가이고 자아의 재구성의 작가로 모두가 동일화 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마치 자신이 그런 작가라는 평가에 그저 좋아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동시대적 맥락 속의 실험, 매체의 확장 가능성 등 화려한 필체로 작가를 착각에 빠지게 하는 문장에 이제는 작가가 스스로 신중해야 한다.
관객은 화려한 미사여구의 문체처럼 미술 작품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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