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미술에 대한 한국화의 자취와 그 입장 민족미술에 대한 한국화의 자취와 그 입장
강 행 원
1.
21세기 문화지형의 빠른 변화를 체감하면서 20세기의 한국을 진단해 보면 기복이 심한 전환의 시대였다. 불행하게도 전환기의 전반부는 식민지 시대였으며 그 후반기는 오늘에 이르도록 분단으로 머물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을 앓고나온 민족미술에 있어서 한국화의 입장을 언급하려면 먼저 전환기시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우리의 근·현대미술은 식민문화의 잔재를 머금은 제도미술을 중심으로 ‘국전’을 향한 출세지향의 보수적인 화풍과 국제성을 내세운 모더니즘계열의 실험미술이 70년대까지의 한국미술을 이끌어 온 셈이다. 특히나 한국화는 동양화라는 장르의 이름에서조차 식민잔재의 탈을 벗지 못한 채 제도미술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잔재를 청산하자는 70년대 후반의 각성으로부터 81년도 ‘미술대전’에서 비로소 ‘한국화’로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서 미술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념들이 촉발하여 정치적으로 대치하는 어려운 국면에서 그 질서재편의 핵심으로 ‘민족미술’이 새로운 강줄기를 이루고 흐르게 된다.
우리에게는 짓밟힌 시대로부터 분단시대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지탱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민족주체의 정체성으로써 20세기의 한국인에게 주어진 화두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식민문화가 강제되어 그 아류의 답습으로부터 타락에 이르는 동안 한 세기에 걸쳐 다수가 힘에 종속되거나 자주성의 방관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전환기의 시작점이자 제국주의 산물이기도한 국운의 기로는 민족자존이 무너져 내린 부끄러운 시대였다. 어느 시대에서도 수구(守舊)와 반동(反動)이 없지 않았지만 일제하에서 한국화단의 ‘한국화’는 조선전통과 일본근대라는 갈림길에서 당면한 진통을 겪게 된다.
이점에 대해서 미술평론가 원동석씨는 “일제의 창구를 통하여 일본적 근대 남화, 혹은 신 일본풍이 밀려들어와 제도미술로써 요구함에 따라 작가들은 전통적 보수와 일본적 진보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기반을 쌓을 것인가 하는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던 것이다”라고 호남 문인화 소고에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의 행간은 격변의 식민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문화적 가치관의 전환기를 대처하는 작가적 자세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에 영합한 발 빠른 인사들은 식민문화의 주구가 되어 잘 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서서 어렵게 살았던 작가들이 많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우리의 근대미술은 조선의 회화문화가 모두 ‘동양화’란 이름으로 통합되어 식민공간의 어두운 터널을 진입하고 있었다. 비로소 여기서 일기 시작한 바람은 국권(國權)을 빼앗긴 새 시대에 대처하는 민족사회의 자주적 전통의 절실한 자각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조선회화문화가 살아져 버리고 동양화, 서양화 하는 말은 언뜻 듣기에 동서양화의 분류방법처럼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일본의 야욕은 이 이름을 범아시아 식민지문화권을 구축하기위한 목적으로 붙인 것이다. 그래서 그 자각은 다시 ‘조선서화’라는 이름으로 정체성회복을 꿈꾸며 조선서화미술회가 만들어져 주체적 전통을 찾으려는 노력이 10여년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현실적으로 큰 위력이 발휘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정신은 민족자주의 성찰을 쌓아올려 일본적 제도미술과의 대응을 실행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뜻을 기려야 할 일이다. 한국화의 원천적인 지류는 이러한 맥락의 개념으로부터 20세기 전반기에 있었던 자주의지에 대한 품성을 민족미술에서도 그 정신의 동질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3.
20세기후반 해방이후 6.25 비극은 한민족이 두 정부를 지향하는 분단국으로 체제수호를 위한 많은 국력소모를 가져왔다. 그 와중의 남한정부에서는 3.15부정선거,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 등의 숨 가쁜 상황들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정18년 긴 치세의 겨울공화국이 불명예스러운 마감 뒤에 12,12의 정통성 없는 군사 쿠데타가 또 일어나 264일이라는 세계최장기일을 거처 집권하게 된다. 그것이 80년대의 새로운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광주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대 학살참극은 온 국민의 분노를 넘어 치를 떨면서도 그 울분을 역사에 맡기고 뒤집힌 속을 삭여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암울했던 민주화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문화인들에게 던져진 정체성과 주체성의 그 물음 앞에 스스럼없는 대답이 있었다. 그 용기가 회화 이념에 대한 다양한 촉발이며 80년대의 미술운동이다. 우리들은 계속 분단시대를 살아오면서 정권안보의 비토대상으로 비춰지면 무조건 간첩사건의 연루자나 사상범으로 지목하여 반공법으로 묶었던 많은 탄압사례는 끝이 없었다. 심지어는 미술작품에까지 반공법을 적용하여 몇 명의 작가들이 중형을 선고 받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민주국가에서 창작물에 이런 법이 적용되는 것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권유지의 속성을 들어낸 그들의 무력적인 악랄한 자행에 맞서 민중미술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어 갔다. 구체적 표현으로는 서슬 퍼런 군정의 무차별적이고도 폭력적인 탄압자행에 맞서 이에 따른 미술인들의 대항력은 더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80년대 미술운동의 주최가 곧 민족미술협의회 탄생인 셈이다. 필자자신도 민족미술협의회 창립총회에서 운영위원의 소임을 맡았던 한사람이다. 정통성 없는 제2군정의 정권수호의 몸부림과 그 위협에 대응하려는 의식군들의 집합은 다양한 장르에서 모여든 정체성과 주체성으로 무장한 집단으로 당당히 맞서게 되었다.
문화예술운동은 줄곧 모든 사회적 의식을 돕는 여러 행위의 구호와 함께 문화의 최종목표에 이르도록 발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작가들을 장르별로 통합해서 보면 몇 백 명에 이른다. 하지만 한국화 분야에서만 살펴보면 80년대 제1진에 속하는 작가들은 강행원, 김경주, 김진수, 박문종, 박재동, 송만규, 옥봉환, 조진호, 홍성민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제2진에 속하는 작가들은 곽재경, 김상섭, 김세현, 김호석, 류충열, 배영환, 성병희, 송문익, 양상용, 유은종, 이재호, 임향한, 임흥수, 전성숙, 정세학, 진영조 최애경, 하경옥, 하성읍, 허달용 등이며, 90년대 중 후반 제3진 작가들은 강금복, 김미경, 김천일, 박영균, 손순옥, 송현경, 안성금, 이정희 등이 참여했었다.
한국화 장르는 대략 30여명 조금 넘는 작가들이 활동한 셈인데 참여시기의 간격이 계몽의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각자의 양식개념에 있어서의 문제가 어떻게 발전해 갔느냐 하는 점은 미술운동과 무관할 수 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암울했던 정통성 없는 정치사회의 변혁을 겪어 오면서 발휘되었던 작가의식도 변화 되였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한국화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들도 진부한 양식에서 재료에 이르기까지 장르 개념을 넘어 서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각자 표현방법이 분광되어 김경주, 김진수, 조진호 등은 판화를 같이 했으며, 박재동은 유화에서 한국화를 경유하여 만화 쪽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옥봉한은 조소에서 한국화로 변환하는 등 장르개념에 메이지 않았다. 그 외에도 홍성민은 걸개그림에 참여했으며 운동성향에 따라 콜라주를 이용하거나 설치미술 쪽으로 이동되어져 어떤 양식에 억매이지 않고 각자 자유로운 표현활동에 맡겨졌던 것이다. 민족민중미술은 어떤 형식이나 고정된 틀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제이념에 따라 표현 매체가 잘 드러나는 혼합 재료들을 많이 사용하였던 점이 특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한국화역시 같은 맥락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민중미술은 70년대의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우리의 현실을 담은 새로운 시작이지 어떤 양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80년대 이후의 미술운동은 보편적으로 민중미술자체를 하나의 양식개념으로 보아왔던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미술의 태동은 정통성 없는 정부는 물론이며, 예술계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버린 제도미술의 타락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보다 다양성 있는 우리다운 목소리로 새로운 창작지평의 활로를 열기 위한 문화운동으로써의 사명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회의 풀리지 않는 곳곳의 비민주적인 모순성과 문화마당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며 노력이지 결코 그 자체가 민중미술의 양식개념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한국화만을 별계(別界)로 조명하거나 따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고착된 울안에 갇혀있던 식민잔재의 집을 허물고 재료나 양식개념의 해방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방은 더더욱 어떤 틀이나 형식에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이려니와 또한 민족미술이 지향하는 개성적 표현의식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한국화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회화조형의 구분을 넘어 어떤 틀이나 형식에 메이지 않았다. 다만 그 정신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는 한 자락 진실을 이상향으로 여는 참모습에 두고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제아무리 짓밟혀도 끊이지 않고 큰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주체적 정체성 확립이 무장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그 목적은 이 땅의 내일에 신명나는 세상으로 열어가는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정신은 한국화만이 아니라 민족미술인의 전체 뜻이기도 할 것이다.
4.
한국문화의 20세기말미를 장식한 민족미술을 21세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감회는 일정기간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문화의 흐름을 되찾아 가기도 하고 왜곡된 것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또한 민중미술의 표현활동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을 문제시하여 순수성을 의심받기도 하였으며, 이 미술을 비판적으로 보고 기피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점 노력할 부분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깨어있는 의식으로부터 정체성과 주체성확립으로 이 땅의 문화적 구현을 이룬 공과는 장르를 넘어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제하에서처럼 민족 자주의식의 성찰에서 깨어나듯이 민족미술역시 이러한 자각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80년대 시대상황에서 주어진 우리의 입장을 돌아보면 깨어난 자와 깨어나고 싶지 않는 자, 곧 진보와 보수의 입장 차이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이 한국화에서는 더욱 극심하였다. 깨어나고 싶지 않는 자들은 일제하에서 발 빠른 적응을 보이며 잘살던 자들과도 흡사한 기득권으로 뭉쳐진 덩어리와 그들을 추종하는 비 의식군의 무리들이다.
특히나 한국화에서 깨어나 있는 자들은 비록 양적으로는 많지 않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행동하는 양심을 건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소수일지라도 깨어있는 자들의 의식과 함께 살아있다는 사실을 자긍하고자 한다.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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