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메이커|기사입력 2008-01-03 17:45

기획사·언론사가 마련한 전시에 장소만 빌려줘 수집·관리·연구·교육 등 본연의 기능 도외시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김세구 기자>

'상업주의에 물든 국공립 미술관.’ 요즘 국공립미술관을 바라보는 미술계 안팎의 시각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립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단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에 본관이, 덕수궁에 분관(덕수궁미술관)이 있다. 또 대표적인 공립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경기도립미술관 등이다. 여기에 국고 지원을 받지만 분류상 사립으로 돼 있어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도 공공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이를 포함하면 국내 대표적 국공립미술관은 10개 정도(군 단위 미술관 제외)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무엇보다 ‘공공성’과 ‘공익성’을 우선시해야 할 국공립미술관이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 쌓기에 급급해 상업논리에 젖어 있는 점이다. 일부 언론사나 민간 사업자가 외국 유명 미술관들의 작품을 빌려와 돈을 버는 일에 단순히 장소를 대여함으로써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시립미술관,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인 덕수궁미술관 등이 지난 수년간 일부 언론사와 민간 사업자가 유치한 이벤트성 전시를 위해 공간을 내준 것은 ‘프랑스 오르세미술관 한국전’ ‘밀레의 여정전’ ‘샤갈전’ 등 20여 개에 이른다.

특히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의전당은 1년 내내 민간 사업자사나 일부 언론사가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들여온 작품으로 전시장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7년도만 해도 서울시립미술관의 경우 ‘르네 마그리트전’, ‘끌로드 모네전’, ‘반 고흐전’ 등 1년의 3분의 2 이상을 특별기획전이라는 미명하에 외부에서 유치한 전시를 열었다. 모두 모 신문사가 주최한 전시다.

'반 고흐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김세구 기자>

이들 전시를 통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올린 수익은 전시에 따라 2억~3억 원 수준. 명목상 입장료 수입인 것처럼 표기하지만 실상 계약내용을 들여다보면 전시공간을 빌려주는 대가로 일괄적으로 받은 돈이다. 서울시립미술관 관계자는 “계약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미술관은 관람객 규모와 관계없이 일정액을 받고 입장료 수입은 기획사 측이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며 다만 관객이 일정수준이 넘을 경우 입장료 수입의 일부를 미술관이 갖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반고흐전’의 경우 미술관은 2억5000만 원을 받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08년도에도 ‘브르델 조각전’(2월 29~8월 8일, 소년한국일보), ‘르누아르전’(5월 7일~8월 24일, 조선일보), ‘퐁피두전’(11월 22일~2009년 3월 22일, 지엔씨미디어) 등 민간 사업자나 언론사가 마련한 전시에 실상 장소만 빌려주는 프로그램으로 꽉 차 있다.

상업적·문화식민주의적 이벤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한술 더 떠 ‘미술관이 아니라 미술전시공간’이라는 오명까지 듣고 있다. 2007년 ‘고흐에서 피카소까지’(조선일보), ‘오르세미술관 한국전’(지엔씨미디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솔명엔터테인먼트) 등 거의 1년 내내 외부에서 유치한 전시를 위해 공간을 내주었다. 예술의전당도 외부 기획을 위해 장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얻는 수익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대동소이하다. 예술의전당 전시관계자는 “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3개월을 기준으로 할 경우 대관료와 부대비용을 합해 2억 원 정도를 예술의전당이 갖는다”며 “이는 사립미술관의 임대료와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기 때문에 절대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막을 내린 ‘루브르박물관 소장품’전 역시 민간 사업자인 지엔씨미디어가 주관한 전시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에서 2007년 여름 열린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의 경우에도 모 신문사와 방송사가 공동주최로 돼 있다. 국공립미술관이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의 돈벌이에 맛을 들이면서 국공립미술관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2조 2항에 따르면 ‘미술관이란 문화·예술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박물관 중에서 특히 서화·조각·공예·건축·사진 등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관리·보존·연구·전시·교육하는 시설’이다. 즉 이는 국내 국공립미술관이 미술관의 존립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수집·관리·보존·연구·전시·교육 중 다른 것은 도외시한 채 전시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전문가들은 국립미술관이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인구가 많은 서울이 아닌 과천에 소재한다는 것은 정부의 미술관정책이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과천 소재 국립현대미술관 전경.

더구나 전시도 미술관 내 전문 인력이 자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연거푸 민간 사업자나 언론사가 급조한 상업적 전시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클 수밖에 없다. 이인범 상명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는 “미술관이 언론사와 손잡고 해외 유명 미술관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은 일본의 영향”이라며 “하지만 일본은 적어도 교육적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시일 경우 들여오며 그때도 미술관이 주축이 되고 언론사는 후원이나 협찬을 통해 전시를 유치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언론사가 전면에 나선다는 점이 다르다”고 전했다. 류동현 월간미술 기자는 “모 신문사가 블록버스터 전시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 사업에 뛰어드는 매체가 많아졌다”며 “기획사와 언론사, 미술관을 블록버스터전시의 3위일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라고 말했다.

언론사와 국공립미술관이 손잡고 만든 블록버스터 전시는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국공립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언론사의 찬사 일변도의 비평은 혹세무민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미술평론가는 “덕수궁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예술의전당이 지닌 권위는 일반인으로 하여금 전시에 대한 일종의 보증서 같은 인식을 갖게 하는 데 문제가 있다”며 “언론 역시 객관성·중립성·공익성을 망각한 채 자사의 이익 증대를 위해 일방적으로 극찬을 쏟아내는 것은 매체가 가진 위력으로 독자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공립미술관에서 벌이는 잇따른 블록버스터 전시가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미술평론가 김성호씨는 “블록버스터 전시는 실상 해외 유수한 미술관의 소장품을 막대한 대여금과 보험료를 지불하고 빌려온다는 점에서, 당시 지출분을 만회하고 이를 넘어서 대흥행의 수익 창출을 도모하는 엔터테인먼트적 소통에 국한하기 십상”이라고 한 기고문을 통해 주장했다.

미술관 자체 기획전시 설땅 없어 물론 이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가 교과서에 나올 법한 세계적인 명화들을 외국에 나가지 않더라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미술 인구의 저변을 확대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샤갈전’ ‘마티즈와 야수파전’ ‘피카소전’ ‘반고흐전’ 등을 실제 기획한 서순주씨는 “아무리 좋은 전시라고 해도 관람객이 없으면 공공미술관의 기능을 충실히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그나마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면서 국공립미술관이 대중과 가까워졌다”고 주장했다. 서씨는 또 “자체 기획이라는 미명하에 1만 명도 안 오는 전시를 위해 수십억의 공공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민간 사업자든 언론사든 좋은 전시를 유치해서 미술관이 자체 기획할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하고 미술 인구의 저변을 넓히는 게 바람직한지 따져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미술전문가들은 이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들의 또 다른 문제는 ‘철학과 내용의 빈약’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김연진 이영미술관 부관장은 “국공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블록버스터 전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시 의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라며 “예술의전당이건 서울시립미술관이건 설령 대관 중심이라고 할지라도 전시를 유치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이유는 공익을 대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으로 이인범 교수도 “1990년대 초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몬드리안전’을 열 때 그 준비기간이 자그마치 8년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해석과 독창성이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며 “그러나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반고흐전’만 해도 고흐를 왜 받아들이고 있는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하는 자각이 보이지 않고 다만 상업적이고 문화식민주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미술전문가들은 내용 면에서 지출 절감을 이유로 주제에 부합하는 작품들이 아닌 주변부 작품들로 전시를 구성하는 일이 많은 것도 국내 블록버스터 전시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미술평론가 김성호씨는 “이는 미술사적 맥락에 위치를 점유하는 작가들의 본질적 의미를 오도하기 쉽다”며 “물론 여기에는 인지도가 있는 유명 작품들을 대여하는 측에서 많은 부분 대여금지 목록으로 정하고 있는 탓도 잇지만 설사 협상이 타결된다 할지라도 훨씬 높은 작품의 보험료를 감당할 길이 없어 알맹이는 빼고 껍질만 가져와 불균형한 작품을 선정해 전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밝혔다.

국공립미술관들이 이처럼 외국 유명 미술관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데 장기간 공간을 내주는 것은 가뜩이나 전시기회를 갖지 못하는 국내 작가들로 하여금 더 깊은 소외감을 느끼게 한다. ‘퍼블릭 아트’ 홍경한 편집장은 “국공립미술관들이 민간자본으로 유치하는 이런 전시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국내 작가들의 전시 기회를 더욱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문화정체현상을 빚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외부 기획의 전시가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의 대다수 기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미술관의 자체 기획력을 상실하게 한다는 점이다. 공동주최라고 하지만 실상 일정부분 지분만 챙기고 기획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술관 내 미술 전문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학예사(큐레이터)가 민간 사업자나 언론사가 들여온 상업적 전시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인력으로 전락한 게 아니냐는 한탄 어린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공립미술관이 안고 있는 이 왜곡된 현실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다. 해외 유명 미술관의 명작들을 전시할 만한 조건을 갖춘 미술관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인력과 예산 부족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관 측은 자체적으로 블록버스터 전시를 유치할 수 없는 이유는 엄청난 대여보험료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해외 전시물 국가보장제 도입 필요 현재 국공립미술관의 인력구조도 해외 미술관과 연계한 대규모 전시를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 교수는 “블록버스터 전시를 기획해 열려면 최소 2, 3년이 걸리는데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장의 임기는 3년인 데다 학예사 즉 큐레이터도 대부분 1, 2년의 계약직이어서 수년 앞을 내다보고 뭔가 굵직한 것을 기획해내는 게 시스템상으로 불가능하므로 이의 개선이 절실하다”고 단언했다. 이와 관련해 이인범 교수는 “국공립미술관의 경우 관장 임명권은 대통령이나 지자체장에 있는데, 국공립미술관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국민이나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책임 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실질적인 임명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술관의 자체 기획력이 갈수록 떨어지다 보니 자체 기획으로 전시하기로 공고했다가 취소하는 일도 적지 않다. 일례로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전시안내 책자를 통해 2007년 기획전시로 안내한 ‘다다’를 취소하면서 따로 공지조차 하지 않아 원성을 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http://www. moca.go.kr)의 ‘묻고 답하기’ 코너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의 실망스러운 행정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미술전문가들은 이 같은 국공립미술관이 지닌 각종 문제를 개선하려면 무엇보다 문광부의 미술관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미술관의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관장의 경우 미술관 전문 경영인에 맡기는 동시에 임기를 늘려야 하며, 학예사의 신분보장과 혹은 게스트큐레이터제도(초빙학예사)를 실시해 미술관 내 전문인력이 소신을 가지고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블록버스터 전시를 자체 기획으로 유치하기 힘든 것이 엄청난 대여보험료 때문이라면 영국, 스웨덴, 미국 등지에서 실행하고 있는 국가보장제도(지불보증, National Indemnity)를 도입하라는 목소리도 높다. 국가보장제도는 해외 전시 때 국가에서 전시대여에 따른 보험을 지불보증해주는 제도다. 박천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은 “만약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개월 전 열린 ‘루브르전’을 국립박물관이 직접 기획하고 국가가 일종의 보증을 하였다면, 훨씬 저렴한 기획비용으로 전시를 개최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는 곧 입장료의 가격인하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 실장은 또 “언론사나 민간사업자가 주관하는 블록버스터 전시라도 국공립미술관이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국공립미술관에 그와 관련한 엄격한 조례를 만들어 원칙과 기준이 있는 전시되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